다음 달 스케줄이 나와야, 비로소 약속을 잡는다

“그때 시간 돼?”

친구의 이 짧은 물음에, 간호사 선생님은 쉽게 답하지 못합니다. 다음 달 근무표가 아직 안 나왔으니까요. 그래서 대답은 늘 비슷합니다. “음… 표 나오면 알려줄게.”

저는 이 한 문장이, 간호사의 삶을 가장 정확하게 담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표가 나와야 ‘살 수 있는’ 삶

대부분의 사람은 미래를 어느 정도 미리 삽니다. 다음 달 셋째 주 토요일에 친구 결혼식이 있으면 달력에 적고, 부모님 병원 예약을 잡고, 아이 졸업식 날짜에 맞춰 연차를 냅니다. 계획이 곧 삶의 리듬입니다.

그런데 간호사 선생님에게는 그 리듬의 출발선이 매달 뒤로 밀립니다. 근무표가 나오기 전까지는, 내가 그날 낮에 깨어 있을지, 밤을 새우고 쓰러져 있을지조차 알 수 없으니까요. 결혼식 초대장을 받아 들고도 “갈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 미뤄야 하고, 오랜만에 시간을 맞춰보려는 친구 모임에서 가장 늦게까지 답을 못 하는 사람이 됩니다.

그렇게 몇 번 미루다 보면, 어느 순간 사람들은 더 이상 묻지 않습니다. 근무표가 앗아가는 건 하루의 시간만이 아닙니다. 관계와, 나중에 돌아보면 다시 오지 않을 순간들입니다.

책임감이 강할수록 더 아프다

이상한 일입니다. 이 불편을 가장 아프게 느끼는 사람은, 대개 가장 성실한 선생님입니다.

밤낮이 뒤바뀌는 근무 속에서도 공부를 놓지 않으려는 사람, 지쳐 돌아와서도 아이와의 약속만은 지키고 싶은 사람. 그런 분일수록 “이번에도 못 갔다”는 죄책감을 더 깊이 안습니다. 자기 삶을 소중히 여기고, 곁의 사람을 소중히 여기기 때문에 더 그렇습니다.

저는 그 죄책감이, 그분들의 잘못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예측할 수 없는 구조 안에서, 누구라도 그렇게 됩니다.

저도 오래 ‘나중에’를 믿었습니다

사실 저도 오래 그렇게 살았습니다. 새벽까지 일을 붙들고, 곁의 사람들에게는 “이것만 끝나면”, “나중에 시간 나면”이라고 미뤄두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늘 다음이 있을 거라 믿었으니까요. 그런데 미뤄둔 시간은 생각보다 자주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그때 함께였으면 좋았을 순간들은, 대개 그때뿐이었습니다.

간호사 선생님들이 근무표 앞에서 “표 나오면 알려줄게” 하고 약속을 미루는 이야기가, 저에게 남의 일처럼 들리지 않는 이유입니다. 저 역시, 미뤄서 잃어봤기 때문입니다.

예측 가능은 사치가 아니라 기본이다

우리는 흔히 ‘워라밸’을 말할 때 근무 시간의 길이를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간호사 선생님들과 이야기를 나눌수록, 진짜 문제는 시간의 ‘양’보다 ‘예측 가능성’에 있다는 걸 알게 됐습니다.

몇 시간을 일하느냐보다, 내 다음 달을 미리 그려볼 수 있느냐. 삶을 미리 한번 살아볼 수 있느냐. 그것이 여행을 계획하게 하고, 병원 예약을 잡게 하고, 소중한 사람에게 “그날 갈게”라고 약속하게 합니다.

예측 가능은 특별한 혜택이 아닙니다. 자기 삶을 자기 손으로 계획할, 누구에게나 당연한 권리입니다. 다만 간호사 선생님들에게는 그 당연한 것이 오래 당연하지 않았을 뿐입니다.

제가 붙들고 있는 한 가지

물론 저는 압니다. 근무표는 완벽히 예측할 수 없다는 것을. 갑작스러운 사직, 병동의 사정, 예기치 못한 공백 앞에서 표는 언제든 다시 흔들립니다. 어떤 기술도 그 현실을 통째로 없앨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저는 ‘언제나 예측 가능한 근무표’를 약속하지 않으려 합니다. 지키지 못할 약속은, 하지 않는 편이 낫다고 믿으니까요. 대신 제가 붙들려는 건 이것입니다. 정해질 수 있는 것은 조금이라도 더 일찍 알려드리고, 바뀔 때는 왜 바뀌는지 보이게 하는 것. 완벽한 예측이 아니라, ‘몰라서 불안한 시간’을 조금씩 줄여가는 것. 선생님이 다음 달 어느 토요일에 “그날 시간 돼”라고 조금 더 일찍, 조금 더 마음 편히 답할 수 있게. 저는 그 방향이면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Better schedules. Better days. 더 나은 근무표가, 더 나은 하루로 이어지기를 바랍니다.


혹시, 다음 달 표가 안 나와서 미뤄야 했던 약속이 있으셨나요? 못 간 결혼식, 미룬 여행, 지키지 못한 아이와의 약속 같은 것들 말입니다. 30분만, 선생님의 이야기를 들려주실 수 있을까요? 특히 직접 근무표를 짜 보신 분이라면, 그 무게를 아는 이야기를 가장 듣고 싶습니다. 인터뷰에 참여해 주실 분을 찾고 있습니다. Duti가 완성되면, 함께 이야기 나눈 선생님들을 가장 먼저 초대할게요. 듣고, 기록하고, 반영하겠습니다.

→ 30분, 이야기 들려주기 (비대면 가능)

📮 · @duti.lab